2014. 12. 28. 01:53

세째날


오늘은 교토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교토를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교하기도 한다. 분위기도 비슷하다고 한다. 처가가 경주라 자주 경주를 방문 해본 입장에서는 과연 그런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교토는 일본의 정신적인 수도라고 할 수 있다. 서기 794년에 일본의 수도가 되 이래 1869년 도쿄로 수도가 옮겨 지기 전 까지 1000년 이상 일본의 실질적인 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교토는 일본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현재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만 17만점이라는 소리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태평양 전쟁 중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교토에서 많은 것을 볼 생각은 없다. 급박하게 일정에 쫒겨서 다니기는 싫다. 게다가 교토는 볼 것이 너무 많다. 교토는 크게 교토타워와 쇼세이엔 정원 등을 볼 수 있는 교토역 주변, 기요미즈데라와 지온인 그리고 기온을 볼 수 있는 교토동부, 금각사와 료안지등이 있는 교토서부, 헤이안 시대 귀족 별장이였던 우지와 교통 경마장을 만날 수 있는 교토남부, 교토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사찰들이 밀집해 있는 오하라 지역인 교토북부, 은각사와 철학자의 길이 유명한 긴카쿠지주변, 그리고 도케츠교와 텐류지 등이 유명한 아라시야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는 아라시야마를 첫날 방문하였기 때문에 교토 동부의 일부와 킨카쿠지 주변만 돌아 보기로 하였다.


아침 부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교바시 역으로 바로 출발하려고 했으나 화장실 등 뒷 정리 때문에 윤서와 나만 먼저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에서 건물 밖으로 나와 근처를 돌아보니 사무실들이 있었다. 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 안이 그냥 보인다. 무슨 게임회사 혹은 디자인 회사라고 되어 있는데 오사카성과 관련된 게임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업체인 것같다. 창문 안에 앉아 있는 직원의 PC에는 인터넷 브라우저가 열려 있는데 뉴스 사이트 인 것 같았다. 그 시간을 생각해 보면 출근해서 얼마지니지 않았을 때인데 일보다는 뉴스를 먼저 보나보다.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아내와 현서가 내려온다.


다이에에 들러서 물과 이동 중 먹을 과자를 샀다. 육교 쪽을 나와서 가는데 육교 위에 폭우 시 조심하라는 문구가 있다. 아마도 집중호우가 올 때면 육교에서 폭포처럼 비가 내려서 운전에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비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태풍이나 집중호우는 제법 많은 편으로 알고 있다. 운전자를 배려한 문구가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교토를 가기 위해서는 우메다에서 한큐 선을 이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쿄바시에서 케이한 선을 이용하여 쿄토로 가기로 했다. 게시판에서 본 일본 유학생의 충고와 게이한철도의 시간표등을 조합해 보니 우리가 묶고 있는 곳에서는 교바시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듯하다.


교바시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역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하자면 이 역은 크게 세가지 종류의 노선을 탈 수 있다. 물론 각각의 노선에 때하여 타는 역사는 다르다. 하나는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이며, 게이한 전기철도, 그리고 나머지는 오사카 시영 지하철이다. JR 서일본 역에서는 오사카 순환선, JR도자이선(東西線), 기타마치선((片町線) 애칭으로 캇켄토시선(学研都市線)이라 불림)의 세 가지 노선이 운행된다.  교바시 역 주위에는 오사카 비지니스 파크와 묶어서 번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제법 큰 유흥가가 있어 밤 늦게 역 주위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여자분들도 나와 있다.  교바시역 이름의 유래가 된 쿄바시 즉 경교(京橋)는 교바시역에서 좀 떨어져 있다. 작명한 느낌이 서울대 입구역과 비슷한 것 같다.  


구글 맵에서 교토역으로 목적지로 선택하니 종착역이 교토역이 아니라 시찌조(七條)역이라고 한다. 교토역은 JR이 운영하는 곳이다. 역에서 차를 탈 때는 항상 방향이 문제다. 어느 플랫폼으로 가야하는지 모르겠다. 플랫폼 마다 어디라고 되어 있는데 그 곳에는 내가 가는 역이 아니라 내가 가는 역 쪽의 종착역이 표시되기 때문이다. 노선을 따라서 확인해 보니 케이한 교토라인의 종착역은 데마치야나기(出町柳)역이다. 잠시 시간을 지체해서 그런지 플랫폼에 올라가니 기차가 출발한다. 하지만 바로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다. 9시 17분 기차를 탔다. 시치조역 까지는 5개 정류장을 거치고 시간은 41분 걸린 단다. 첫날 아라시야마로 갈 때와는 다른 노선을 달린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 교토까지 가는 동안 한참은 시가지를 지나간다. 그러다 잠시 공사가 진행되는 구간을 지나자 마자 교토시내가 들어온다.  선입관 때문인지 교토의 분위기는 예스럽다. 적어도 경주보다는 그렇다. 시치조역은 그리 크지 않다.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간 화장실은 너무 구석에 있다. 물론 청결하기는 하였다. 역은 지하에 있었다. 3번 출입구를 통하여 지상으로 나왔다. 아내는 100번 버스를 타면 쿄토의 주요한 모든 곳을 갈 수 있다고 한다. 100번 버스는 시치조 근처로 온다. 하지만 교토는 천천히 걷는 것이 좋다고 해서 우선 교토역으로 걸어가기로 하였다. 역에서 나오자 마자 다리를 건넜다. 다리가 걸려있는 시내의 물은 맑다. 잠시 걸어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쿄토역 앞에 새워진 교토타워가 보이다. 교토역이 멀지 않다. 이 곳 저곳 구경하면 걸었다. 한 가지 신기하고 의문스러운 것은 시간이 10시가 넘었는데 문을 열고 있는 가게가 거의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파트도 보인다. 일본에서 특이하게 느낀 것은 대규모 아파트가 없다는 것이고, 아파트 베란다에 삿슈 같은 것이 설치된 곳이 없다는 점이다. 교토역으로 가기 바로 전 사거리에는 주택 회사가 있다. 소규모 주택을 짓는 것 같은데 깔끔한 사무실 외관이 인상적이다. 사거리를 지나자 갑자기 높은 빌딩들이 나타난다. 교토역은 호텔과 쇼핑센터가 같이 있다. 역 앞에는 일본 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시설도 되어 있다. 우리는 100번 버스를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100번 버스 정류장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있다.  100번 버스는 평일 날 10분 간격으로 계속 운행된다. 버스를 타서 자리에 앉아서 기념으로 셀카봉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바로 은각사로 가자고 한다. 은각사와 철학자의 길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우리가 여행 중인 이 때 교토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쿄토의 단풍은 크게 동쪽은 단풍과 서쪽의 단풍으로 나누어 보게 된다. 이때 서쪽의 단풍은 우리가 첫날 가 보았던 아라시야마와 금각사까지의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동쪽의 단풍은 은각사와 호넨인 등의 사원이 특징인 히가시야마(東山)을 뜻한다. 아마 아내는 쿄토의 두 단풍 명소를 둘 다 즐기고 싶었던 것 같다.

버스는 시치조 역을 지나 교토 33간당(博物館三十三堂前)를 지났다. 기요미즈데라(清水寺)로 갈 수 있는 교조자카(五條坂) 바로 앞에서 아내에게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기요미즈데라는 한 번 쯤 들러야 하는게 아니냐고 했다. 아내는 일단 내리자고 한다.


20141111_132044.jpg


기요미즈데라는 현재 공사 중이라서 별로라는 말을 하기는 하였다. 사람들이 내리기를 기다려 천천히 앞으로가서 간사히 스루 패스를 넣고 내렸다. 이곳의 시내버스도 간사이 스루패스로 탈 수 있다. 기요미즈데라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버스 승객의 대부분이 여기서 내린다. 기요미즈데라는 교토에오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며 학생들의 수학여행 장소로도 유명하다. 연간 관람객 수는 대략 300만명이 넘는다니 대단하다. 실제로 일본 에니메이션에서 수학여행 장면은 기요미즈데라가 꼭 등장할 정도이다. 기요미즈데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이다. 절의 이름은 주변 언덕에서 절의 안쪽으로 흐르는 폭포에서 유래된 것이다. 창건은 헤이안 시대인 798년에 이루어졌지만 163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의 손자가 되는 덕천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재건한 것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언덕위로 13미터 정도 높이 위치한 나무 테라스이다. 이곳은 원래 본당의 부처에게 바치는 춤을 추던 무대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곳에서 교토 시내를 보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곳 난간에서 뛰어 내려서 살아 남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있다.



절에서 발견된 清水寺成就院日記에는 에도(江戶)시대 였던 1694-1894년 사이 148년 간 234명이 뛰어내린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곳에는 뛰어내린 사람의 연령, 거주지, 동기 등이 상세히 조사되어 있다고 한다. 역시 일본은 뭐든지 기록은 철저히 하는 듯하다. 뛰어내린 사람 중 중 85% 정도가 생존을 하였다고 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당연히 다쳤을 것이다. 만약 뛰어 내릴 때 “지금 죽고 싶다”라고 해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가? 살아야 소원을 이룰 수 있는데 살아도 안되고 죽어도 안되는 역설적인 상황일 것이다. 이와 같이 뛰어 내리는 악습은 1872년에야 교토부가 금지를 명하고 무대 주위에 대나무 울타리를 세우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기요미즈데라의 무대와 관련하여 큰 결심을 할 때 일본어로  “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 즉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리는”이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읽은 일본의 교토여행 관련 블로그에는 이 표현에 대하여 다른 해석을 소개 하기도 한다. 그 블로그에는 이 무대가 사실은 장례시설이였다는 주장이다. 에도시대에는 스스로 뛰어 내렸지만 헤이안 시절에는 강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죽은 후에 말이다. 헤이안 시대는 서민들에게는 무덤을 세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판에 야장(野葬)을 하였다. 히쿠치 기요유키(樋口清之)의 逆・日本史 (3) (거꾸로  일본사)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일본어의 번역이 허섭하여 원문도 남겨 놓는다).


清水寺の下は、現在は本願寺の墓地だが、当時から、あの谷間は風葬と火葬の墓場だった。清水寺は懸崖造りの舞台で有名であるが、平安時代末は不便で、しかも建てにくい場所をわざわざ選んであのように高い舞台を造ったのには、それなりの理由があった。あの舞台は、谷間に都の庶民の死体を捨てるために、棚を突き出して造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中略)死体を捨てるのだから、町から遠いほうがいいし、死体の臭気を防ぐために、高いところに舞台を造る必要があった。


기요미즈데라의 아래는 현재 본원사의 묘지이지만 당시부터 그 계곡은 풍장과 화장을 하는 묘지였다. 기요미즈데라는 절벽구조의 무대로 유명하지만 헤이안 시대 말에는 불편하기도 하고 게다가 짓기 어려운 장소를 선택하여 저렇게 높은 무대를 만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무대는 계곡 사이에 서민의 사체를 버리기 위하여 선반을 튀어나오게(돌출)하여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략) 사체를 버리기 것이기  때문에 도회지(町)에서 먼 것이 좋고, 시체 냄새를 막기 위하여 높은 곳에 무대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니 당시의 서민들이 애처롭기도 하다. 애도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또한 이 테라스를 소개할 때 단골로 나오는 말이 이 기둥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조립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의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건축이 목재 건물을 지을 때 구조적 결합에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전북 부안에 있는 내소사를 소개할 때도 건물 전체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고 되어 있다. 별로 특이하지도 않은 것으로 홍보를 하는 능력은 인정할 만 하다.  아마 서양인들에게는 특이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기요미즈데라는 들어가는 나오는 입구에 관람객을 위한 가게가 잘 발달해 있다. 이 상가를 구경하는 것도 기요미즈데라를 찾는 한 가지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절을 찾는 참배객을 위한 가게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연간 300만을 상대하는 대규모의 상가가 되어 있다. 이 상가는 크게 두 군대로 나누어 지는데 하는 차왕자까(茶わん坂)이고 다른 하나는 키요미즈자까(清水坂)이다. 기요미즈데라를 등지고 왼쪽이 차와자까이고 오른쪽은 기요미즈자까이다. 우린 처음 올라갈 때 차왕자까 쪽으로 올라가서 기요미즈자까 쪽을 내려왔다.


20141111_121436.jpg


기요미즈데라로 가는 버스정류장은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소박하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길로 들어선다. 2차선의 좁은 골목이다. 수학 여행단을 태운 관광버스들이 골목에서 내려온다. 천천히 골목을 따라 올라간다. 복잡한 길과 차 때문에 아이들이 신경 쓰인다. 주차장에서 지역 작가의 도자기 전시회가 열린다. 우선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몇몇 가게는 손님들을 호객한다. 제법 거리가 멀다. 부채나 우산을 파는 가게 그리고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서로 어울어져 있다. 이 길이 차왕자까이다. 수 많은 관광객이 줄어지어 올라간다. 한가지 재미이 있는 것은 기모노와 같은 일본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도 그런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다 일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당수는 중국 관광객이 많다. 나중에 보니 한국말을 하는 여자도 기모노를 입고 인력거를 타고 지나간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니 교토에서는 전통복장을 대여하고 머리모양과 장신구 그리고 손가방 까지 빌려주는 업소가 성업을 하고 있단다. 빌리는 가격은 대략 3,000엔 정도라고 한다. 장사하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왜 그런 체험을 원할 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든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기요미즈데라로 가는 정문인 인왕문이 보인다. 잠시 멈추어 아내와 현서를 기다린다. 주위를 둘러 보니 일본의 종교단체 같은 곳에서 단체로 온 듯한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모여 있다. 분위기가 조금 묘하다. 아내와 현서가 도착하여 인왕문쪽으로 걸어 갔다.


20141111_121633.jpg


그런데 갑자기 현서가 울음을 터트린다. 왜 그러냐고 하니 돌이 날아와서 손에 맞았다고 한다. 아니 갑자기 왜 돌이 날아온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위쪽에서 어린 아이가 바닥에 있는 조그만 자갈을 던지고 있다. 애에게 한소리를 하려는데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한다. 현서는 상황을 알고는 금방 울음을 거친다. 다쳤다기 보다는 놀란 듯하다. 인왕문을 반드시 통과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그 쪽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우리 옆에서 조그만 아이도 계단을 기어 오른다. 젊은 부부가 뒤를 따르면서 아이가 굴러 떨어 질까 보고 있다. 정문에 사천왕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문을 통과하여 3층 목조탑을 지나 절 쪽으로 갔다. 입구에는 일본의 신사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원을 비는 나무판이 걸려있었고 무엇인가 참배하는 곳이 있었으며 옆에는 다양한 종류의 부적을 팔고 있었다. 부적의 종류는 합격, 무병, 건강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를 팔고 있었고 지갑에 넣어 다니는 카드도 있다. 그 곳에서 깜짝 놀란 것은 아이들이 한자를 너무 모른 다는 것이다. 현서와 윤서 모두 한자를 오래 동안 써 왔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한자의 상당수는 알 곳 있는 것이라 생각 했는데 당연히 알만한 한자도 잘 모른다. 한자 학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41111_124943.jpg


20141111_125656.jpg


기요미즈데라는 다양한 관광객이 많이 있다. 동남아의 불교 스님이 입는 복장한 분은 여러 신도와 같이 온 듯하다. 나는 입장을 하는게 어떠냐고 아내에게 제안을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별로다.  핵심 부위가 수리 중인 곳을 굳이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요미즈데라를 뒤로 하고 우리는 오른쪽 골목인 기요미즈자까로 내려온다. 내려올 때는 이미 시간이 제법 된 터라 가게들은 문을 모두 열고 시식으로 손님들을 가게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한 가게에서는 말차로 된 녹차와 떡을 주면서 가게 안에서 마시고 가라고 한다. 맛이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취급하는 먹을거리가 어마어마하다. 하나 하나 맛을 다 보았고 맛이 있는 것도 있기는 했지만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단 우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손에 무엇인가 든다는 것이 부담이 된다. 내려가는 길도 사람으로 붐빈다. 먹을 거리를 파는 가게들은 대부분 비슷한 떡을 팔고 있었지만 다른 가게들은 생활용품이나 도자기 우산 등 독특한 상품을 팔고 있다. 부채를 파는 가게와 종이 우산을 파는 가게에는 사진을 찍지 마라는 경고 문구도 있다. 내려가다가 만난 한 곳의 과자(?)는 입에서 녹아 든다. 아내는 과자를 살지말지 망설인다. 처제를 사다 주면 어떻겠냐고 한다. 현서 윤서에게 넣어 놓은 위급 상황 시 연락처에 처제 전화번호가 있어서 사전에 상황을 설명해 두는 바람에 처제는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과자라도 하나 사다 주면 어떻냐는 것이다. 그런데 유통기한을 확인하더니 바로 포기한다.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짧았고 유통기한 내에서 처제를 만날 일은 없다고 한다. 상가들을 구경하면서 걸어 내려왔다. 걸어 내려오다 길은 합류하고 조금 올라올 때 본 도자기 전시장으로 잠시 들렀다가 바로 나왔다. 볼게 생각보다 없다. 다시 조금 전 버스를 내렸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10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 답게 금방 버스가 온다.  


20141111_135317.jpg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내린 곳은 킨가쿠치마에(銀閣寺前)이다. 내리니 방향감각이 없다. 조금 전 기요미즈데라와는 달리 이 곳은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일본 여행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구글지도를 휴대폰에서 열었다. 방향 감각을 찾은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인력거 꾼이 팜플렛을 들고 나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2시간에 500엔이라고 적혀 있는 주차장을 지나서 계속 걷는다.  가게와 식당이 나오지만 기요미즈데라에 비하여면 매우 초라하다. 조그만 냇가가 나온다. 아내는 이곳이 아마도 철학의 길(哲学の道) 같다고 한다. 일단은 은각사로 올라 가기로 했다. 점차 골목은 더 좁아지고 드문드문 가게들이 이어진다. 조금 전에도 말했 듯이 이쪽은 상가는 매우 소박하다. 은각사 입구에 도착하니 슈크림 가게가 있다. 윤서는 슈크림 가게 속에 전시된 모형을 보고 그걸 사달라고 하면서 즐거워 한다.


20141111_140155.jpg


은각사의 정식 명칭은 지쇼지(慈照寺)이지만 정식명칭 보다는 긴카쿠지(銀閣寺)라는 비공식 적 명칭으로 잘알려져 있다. 은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은퇴 후에 살려는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금각사(金閣寺)를 모방하여 은으로 전체 건물을 덮으려 하였는데 죽을 때 까지 소원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는 나중에 선종의 승려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 저택과 정원은 불교의 사찰이 되었다. 이 절은 이끼로 덮혀 있는 숲의 바닥과 모래정원이라고 한다. 은각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잘 가꾸어진 통로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양쪽 옆으로 가지치기를 해서 반듯하게 깍아 놓은 동백나무로 둘러진 벽이 인상적이다.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니 입구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있다. 입장료는 성인 500엔 아동 300엔이다. 입장료를 내고 멋들어지게 생긴 입장권을 받아 들고 들어갔다. 입장권 자체만 보더라도 500엔에 대한 보상이 될 정도 멋스럽다. 문을 통과해서 보니 관람을 하는 방향을 정해 놓았다. 처음 만난 것은 모래를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모래정원이 있다. 모래를 밀대를 이용하여 정리해 놓은 것인데 이를 가레산스이(枯山水)라고 부른다. 가레산스이는 일본의 고유한 정원양식으로 연못이나 냇가 같이 물이 없이 모래나 자갈 그리고 돌을 이용하여 산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물론 모래로 형상을 만들 때는 물을 뿌리기는 한다.  첫날 갔던 아라시야마의 텐류지에도 비스한 정원이 있다. 후지산을 상징하는 모래 정원 등을 한참 구경한 후 연못을 지나서 걷는다. 현서와 윤서는 연못에 던져져 있는 동전을 보면서 아까워 한다. 길은 세용천(洗用泉)이라 적혀 있는 아주 조그만 폭포를 지나 숲으로 이어진다. 숲에서는 은각사의 중요한 특징인 이끼로 덮혀 있는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초록색 양탄자를 숲 전체에 깔아 놓은 듯하다. 한참을 올라가니 산책로 꼭대기에서 교토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그 풍경도 보기 좋았다. 길은 다시 삼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삼나무가 곧게 뻗어 있는 모습을 보니 목재로서의 용도가 부럽기도 하다. 산책로을 따라서 걸어 내려가니 자연스레 입구로 향한다. 물론 입구에는 기념품 가게가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과 그곳에서 구경을 하며 잠시 쉰다.


20141111_142403.jpg


은각사를 나와서 원래 왔던 길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된 길로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을 걷기로 한 것은 그 쪽에서 인력거가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통 인력거는 무엇인가 보여 줄 곳을 다니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쪽에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골목길은 아름답다. 걷던 도중 특이한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걷던 외쪽에 조그만 사당 비슷한 것이 서 있고 그 곳에는 앞치마를 둘러 놓은 비석이 있다. 특이해서 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나중에 알아봐도 여러가지 설이 부분하다. 어떤 이는 임신을 한 여자가 유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어려도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우린 계속해서 인력거가 오는 쪽으로 걸었다. 일반적인 주택가와 비슷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갑자기 길의 정면이 축대와 대나무로 막혀 있고 길은 오른 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왼쪽으로 간다. 길의 오른 쪽에는 함석판으로 벽을 만들어 놓았다.  길 왼쪽에는 높은 건물이 있었고 몇 가지 생활을 위한 배관 등이 아래로 연결되어 있있다. 건물은 잘 다음어진 나무가 심리적인 벽을 형성하고 있다. 잠시 더 걸어가자 호네인(法然院)이 나온다.


20141111_151206.jpg


호넨인은 카마쿠라(鎌倉)시대였던  1175년 선종을 수행하던 호넨(法然)이 제자인 안락쿠(安樂)와 쥬렌(住蓮)과 함께 수행도장으로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가 된 곳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육시예찬이라고 해서 아침과 밤 6시에 아미타불에게 예불을 드리는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수행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방해를 받게 되었다. 1206년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이 총애하던 후궁인 마츠무시(松虫)와 쓰즈무시(鈴虫)가  잘 생긴 두 제자인 안라쿠와 쥬렌의 염불에 매료되어 출가하는 바람에 화가 난 천황은 제자들을 참수하였고 당시 나이가 75세 였던 호넨은 사누키고쿠(讃岐国)로  유배형을 받아 당시의 암자는 버려지게 되다. 이 후 400년간 페허로 방치되었다가 에도시대 초기 1680년  치온인(知恩院)의 38번째 스님인 萬無和尚이 정토종의 사원으로 설립하면서 새롭게 수행을 위한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1953년 정토종의 독립적인 종교법인으로 바뀌어(정확히 말하면 개인소유의 사찰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곳은 입장료는 무료이나 일년 중 대부분 문을 열지 않으며 공개를 하는 곳은 산문과 그 주변 부이다. 다만 일 년에 두 차례(4월 1일~7일, 11월 1일~7일) 가람(伽藍)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20141111_152055.jpg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사선으로 나 있었는데 이를 따라 올라가 왼쪽으로 돌자 산문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일주문과 같은 산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들어 갈 때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에 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들어 갔고 산문은 나중에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처음 만난 것은 모래 위에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는 바쿠사단(白砂檀)이였다. 여기에 바쿠사단이 있는 이유는 산문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참배로 양단의 카쿠사단에는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 물로서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의도이다. 이 곳은 승려가 직접 무늬를 4~5일에 한번 정도 그려서 넣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는 운이 좋았는지 들어 갔을 때 승려가 나무로 만든 도구를 이용하여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산문 쪽에 있는 계단에 앉아 그 광경을 구경하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잠시 보다가 오른쪽에 있는 강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당은 원래 1694년에 대중탕의 용도로 지어졌지만 1977년에 강당으로 개조한 곳이라고 한다. 강당에는 서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예 작품이기는 하나 그림으로도 볼 수 있는 서화일체(書畵一體)의 작품이다. 재미있는 작품이 많다. 특히 웃을 소(笑)자를 표현한 것은 정말 웃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한참을 보다가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다같이 작품을 즐겁게 구경하였다. 나오는 길에 눈에 영어의 철자가 틀린 것이 보인다. 직업의식의 발동인가? 여기서도 오타만 눈에 보이다니... 고민을 하다 큐레이터로 보이는 야자분에게 알려 주고 나왔다. 실수라고 하면서 고맙다고 한다. 하지만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은 뭐지? 아이들과 나와서 여기저기 보던 길에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부른다. 가보니 물이 떨어지는 곳에 나무잎을 놓고 돌을 올려놓아 물이 나무잎을 따라 흐르도록 해 놓았다. 그러고 보니 단풍이 연못에 아름답게 떠있다. 주위을 둘러보니 단풍들이 아름답니다. 나가는 길은 산문 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산문의 지붕이 너무 아쉽다. 원래 산문의 지붕은 파란색 이끼가 융단처럼 나 있어 파란색 이끼와 주위의 단풍이 너무 멋진 대비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 산문의 지붕은 새로 단장한 탓인지 이끼가 전혀 없다.  호넨인이 단풍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이끼가 쌓인 소박한 산문 때문이라고 한다. 소박한 산문과 화려한 단풍의 대비가 사람들을 가을에 호넨인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대비를 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안타깝다. 호넨인이 산문에서 직진을 하여 우리가 들어온 길과는 다른 길로 나왔다. 나오는 길은 계단을 따라서 내려오게 되어 있고 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돌로 호넨인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옆에는 호넨인에 대한 안내문도 붙어 있다. 안내문의 맨 아래에는 한글로 된 것도 있다.  이런 걸로 보면 이 쪽이 주된 통로인 것으로 보인다.


20141111_154131.jpg


호넨인에서 나온 우리는 또 골목을 따라서 걷는다. 또 하나의 절이 나왔지만 그냥 지나갔다. 철학자의 길로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로 확인하고 네거리에서 아래 쪽으로 내려 가기로 했다. 네거리에서 재미있는 팻말을 보았다. 팻말에는 ノートルダム 女學院, 즉 노틀담 여학원이라고 되어 있다. 교토에 웬 노틀담이지? 노틀담의 곱추가 생각나면서 혹시 프랑스계열 천주교재단에서 설립한 학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틀담(Notre-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을 의미한다.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곳에는 성모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이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노틀담의 곱추의 무대가 되는 파리 노틀담 성당도 그 예이다. 프랑스어이니 당연히 프랑스 계열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천주교에서 만든 학교는 맞는데 일부는 틀렸다. 독일에서 여자 교육을 위해 설립한 노틀담 교육 수녀회가 독일 이미자의 자녀교육을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교토에는 패전 직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여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1952년 중학교를 개교한 것이 고등학교, 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아이들이 우리 가족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인다. 철학자의 길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이 아이들도 하교를 하고 있었고 일부 아이들은 현서와 윤서에게 한국말로 인사말을 건내기도 하였다. 우리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현서와 윤서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걷기만 한다. 하교길에 자전거를 이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내리막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간다. 혹시 교차로 같은 곳에서는 사고라도 날 것 같아 불안하다.


20141111_160104.jpg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니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다. 호넨인과 은각사 등을 알려주는 표지판의 아래에 철학의 길이라고라고 적혀 있다. 길을 따라서 은각사 방향으로 가기로 하였다. 단풍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몇 번을 사진을 찍었다. 아내도 아이들도 서로 사진을 찍는 자세를 취한다. 아이들은 개울 속에 커다란 잉어를 보면서 신기해한다. 가는 길 옆은 일반 가정집이 들어서 있다. 지나던 길에는 무인 판매대가 마련되어 있고 몇가지 과일과 음료수가 올려져 있다. 철학의 길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믿는가 보다. 하지만 은각사 쪽을 다가가면 갈 수록 카페나 커피숍 그리고 식당들이 많아 진다.  길을 따라서 걷던 중 반대편에 누군가 곰인형이 의자에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놓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몇몇 여자분들은 귀엽다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 현서도 얼른 달려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처음 은각사로 들어간 입구 쪽에 도착한다.


20141111_161715.jpg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한다. 당고 떡꼬치를 먹겠다고 한다. 150엔이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광지고 또 아이들의 원성(?)이 너무 강해서 먹기로 한다. 아라시야마에서 사먹은 것에 비하여 너무 허섭하다. 한참을 걷고 구경을 했기 때문에 쿄토에서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바로 오사카의 난바로 가기로 했다. 구글에게 물어보았다.  도쿄 시영버스 203번을 타라고 한다. 버스 정류장은 시라카와거리(白川通)에 있다. 버스 정류장을 가는 길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닭꼬치를 팔고 있다. 가격은 120엔으로 당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3개의 고치를 사서 배고픔을 속였다. 수퍼마켓 바로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잠시 후 도착한 203번 버스를 탔지만 다음 정류장 표시를 보자마자 잘못된 방향의 버스를 탔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자고 하였다. 길을 건너지 그곳이 203번 버스의 출발지이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몇번의 정류장(교토대를 지나 간다)을 거친 후 데마치야나기(出町柳)역에 내렸다. 그런데 데마치야나기역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던 여학생에게 영어로 길을 물으니 약간 당황해 하는 듯 하더니 몸짓을 이용하여 길을 알려준다.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들어간 입구인 1번 출입구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역이 지하에 있어서 더 찾기 어렵다.

데마치야나기역은 케이한 전기철도와 에이잔 전철이 같이 사용하는 역이다. 케한 전기철도의 기차는 지하에서 출발하고 에이잔 전철은 지상에서 출발한다. 불행하게도 시간과 정보의 부족으로 에이잔 전철은 이용하지 못하였다. 요즘은 일본에서 산이라고 하면 후지산을 떠올리지만 과거 교토가 수도였들 대 일본에서 산을 을 말하면 히에이잔을 떠올릴 정도 였으며 일본불교의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고 한다. 이산에는 삼나무가 울창하며 천태종의 총본산인 에랴쿠지(延暦寺)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정상에서 교토시의 시가지와 일본 최대호수인 비와호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이번에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다음에 교토를 올 수 있다면 반드시 가 보고 싶은 곳이다.


난바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데마치야나기역에서 난바로 가기로 하였다. 16시 54분에 출발하는 요도야바시(淀屋橋)역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요도야바시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린다. 요도야바시로가는 기차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하긴 기차 밖의 풍경이 특이할 것도 없었지만 오늘 걸은 거리를 생각 한다면 잠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요도야바시에서 내려서 지하도를 따라 움직였다. 미도스지선을 타고 요도야바시에서 난바까지 이동하였다. 저녁은 난바 근처에서 회전초밥을 먹기로 하였다.


20141111_185219.jpg


회전초밥집의 원조격은 켄로쿠스시이다. 켄로쿠스시는 1958년에 요즈음과 같은 형태의 회전초밥집을 창안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원조라고 뭐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초밥 하나 당 세금을 포함하여 135엔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초밥도 다양하기도 하다. 지도로 도톰보리(道頓堀) 의 켄로쿠스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쪽을 이동하였다. 14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돌아가니 가는 중간에 킨류(金龍)라멘집이 있다. 아내는 순간 갈등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이동한다. 두번 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블로그에서 많이 보았던 장면이 보인다. 커다란 게 모양의 조형물이 간판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옆에는 다코야끼를 파는지 문어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우리가 가려는 겐로쿠 스시도 근처에 있었는데 커다른 초밥을 쥔 손이 걸려 있는 건물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 문을 열고 보니 바로 앞에 자리가 4개있다. 기다리지 않아서 정말 좋다. 우리식구는 앉자마자 지나가는 접시를 탐하기 시작한다. 현서와 윤서도 이제는 먹는 정도가 우리가 먹는 것 보다 결코 작게 먹지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초밥을 먹었지만 전체 가격은 그리 많지 않다.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배는 벌써 꽉 찼다. 종업원을 불러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내는 안타까워 한다. 초밥을 너무 많이 먹서 다른 것이 들어갈 배가 없단다.  아이들에게 타코야끼를 먹지 않겠냐고 했지만 아이들은 별로 땡기지 않는단다. 배도 부르기도 하고 아침 조식 부페에 다코야끼가 매일 나오기 때문에 별도로 돈을 내고 사먹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식당을 나온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오사카의 명물인 구리코 전광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오사카에 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리코 전광판 앞에서 사진을 찍어온다. 도데체 이건 뭔가? 구리코는 일본의 유명한 과자회사의 이름이다. 구리코는 정확히 클리코겐을 일본식으로 적은 것인데 1922년도에 출시된 구리코 맨을 그린 과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회사가 내 놓은 상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POCKY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빼빼로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20141111_190022.jpg


전광판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으나 휴대폰의 카메라라서 그런지 역광 때문에 얼굴이 검게 나온다. 구리코맨이 있는 곳을 지나 다리를 건너 신사이바시(心斎橋) 상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번화한 곳이라 사람들이 많다. 여기 저기 가게를 구경하며 지나갔지만 크게 눈에 띄는 가게는 찾기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신사이바시 상가쪽은 사람이 넘처나는데 그 길과 교차하는 작은 길 쪽은 한산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그리 늦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데도 그 쪽 길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상태이다. 왼편에 다이마루(大丸) 백화점이 보인다. 화장실도 생각나고 또 식품부에는 어떤 것이 있나 궁금해서 들어갔다. 백화점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지하에 식품부가 있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아내와 현서가 화장실에 간 사이 윤서와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화장실은 빵집 PAUL 근처에 있었는데 윤서는 빵집 앞에 놓아 둔 의잔에 앉아 있는 듯 하더니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피곤함과 더불어 초밥을 많이 먹어서 오는 식곤증이 윤서를 잠들게 한 것이리라. 다음으로 들린 곳은 디즈니 케릭터 샵이다. 개인적으로 별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들지 않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들어가려고 한다. 한참을 둘러 봤지마 모든 식구들이 내린 결론은 별로 살만한 것이 업다 였다. 상가는 신사이바시 역을 지나 큰 길을 지나서도 한참 이어져 있다. 나중에 보니 100엔 샵의 원조인 다이소도 아주 큰 매장을 가지고 있다.  과자 매장 앞에서 몇 가지 과자를 보고 망설였지만 결국 사지는 않았다.  그날 밤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무척 싼 집였다고 한다.


20141111_192859.jpg


20141111_201143.jpg


아이들과 아내는 피곤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난바로 가서 다른 곳을 볼 생각이였지만 신사이바시에서 지하철을 타기로 하였다. 신사이바시에서 교비시로 가는 지하철 노선은 나카호리 츠루미 료쿠치선 (長堀鶴見緑地線) 이다. 교바시역에서 시영 지하철 역은 처음이다. 역에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족에 별도의 상가가 위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식당들이 건물에 있다. 우리가 묶고 있는 몬테레이 라 쇠르로 가려면 케이한 전철역 쪽으로 지나서 갈 수 있다. 호텔로 가는 길에 다이에에 또 들러 몇 가지 먹을 것을 샀다. 아이스크림 다른 맛을 샀는데 그것 역시 훌륭하다. 호텔에 돌아와서 짐을 정리한 후 사우나로 가기로 했다.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사우나 쿠폰을 써야 한다. 아내는 사우나에 다녀오더니 피로가 풀린다고 했다. 그러나 워낙 많이 걸어서인지 식구들은 쉽게 곯아 떨어진다.

Posted by 해결자